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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C300

BC221 - 진시황 시절 진나라(BC221~BC206) - 최초 통일 왕국

by 프리매쓰 2020. 7. 19.

변방에 있던 ‘진’이 통일을 이룩할 수 있었던 배경은?

진(秦)은 가장 서쪽에 있던 나라였어. 유목 민족의 침입으로부터 주나라를 보호하는 제후국으로 문화적으로는 뒤쳐져 있었지. 이런 진이 중국을 통일할 수 있었던 배경은 무엇이었을까?

첫째, 법가 사상을 채택하여 통일의 기초를 닦았어. 부국강병을 실현하기 위하여 엄격한 법을 시행하여 왕에게 권력을 집중시킬 수 있었음.

둘째, 강한 군사력이 통일에 큰 힘이 되었어. 진의 군사들은 전투를 할 때 투구를 벗어던지고 맨발로 뛰어들 정도로 용맹했다고 함. 진은 공에 따라 상을 주고, 왕족 출신이라 해도 패할 경우 특권을 빼앗는 정책을 썼음. 그러니 모든 군사들이 최선을 다했음. 그리고 유목 민족을 군사로 받아들이면서 군인의 수도 늘리고, 그들의 전투적인 장점을 받아들였던 것도 큰 힘이 됨.

최초의 황제, 진시황

아홉 살의 어린 나이에 진의 왕위에 오른 ‘정’은 최초로 드넓은 중국 대륙을 통일했어. 그리고 그가 제일 먼저 한 일은 위엄에 맞게 자신의 이름을 바꾸는 것이었어. 그것이 바로 옛날 전설 속의 어진 임금들인 3황 5제에서 따온 황제(皇帝)야. 그는 자신을 최초의 황제라는 뜻으로 시황제라고 부르게 했어.

이때부터 황제는 중국의 모든 왕조에서 임금을 부르는 정식 호칭이 되었지.

진의 멸망 - 15년만에 역사 속으로 사라진 제국

책을 불사르고, 유학자들을 땅에 묻었어

진이 법가 사상을 바탕으로 엄격한 정책을 펴자, 유가와 다른 학파에서 이를 비판하는 학자들이 나타났어. 그러자 진시황은 더 강한 방법을 써서 비판의 소리를 잠재우려 했지. 역사책과 의학, 농업에 관한 책을 제외한 거의 모든 책들을 거두어 불태우게 했고, 황제를 비난했다는 이유로 유학자 460여 명을 생매장해 죽이기도 했어.

책을 불태웠다는 뜻의 ‘분서’, 유학자들을 땅에 묻는다는 뜻의 ‘갱유’를 합쳐 ‘분서 갱유’라고 해.

만리장성을 뒤흔든 농민의 함성

진시황릉과 아방궁3), 만리장성 등의 대규모 공사가 계속되었어. 특히 백성들은 만리장성을 쌓는 데 막대한 희생을 치뤘어. 농사를 내팽개쳐 두고 성 쌓는 일에 끌려 나갔고, 무거운 세금, 엄격한 법률은 백성들의 한계를 넘어선 것이었지. 시황제가 죽자 농민의 원성은 폭발했고, 마침내 진승과 오광을 중심으로 한 농민 봉기4)가 일어났어. 이 소식은 전국으로 퍼져 나갔고, 여기저기서 농민들이 성난 파도처럼 일어났어. 이 봉기는 6개월 만에 실패로 끝나고 말았지만, 최초의 통일 왕조 진나라는 이를 계기로 불과 15년 만에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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