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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5 : 을사조약, 가쓰라-태프트밀약

“장지연, 치밀한 보도 기사로 세계에 을사늑약 실상 알렸다”

by 프리매쓰 2021. 11. 2.

“1905년 을사늑약 체결 3일 뒤인 11월 20일 자 황성신문에 실린 기사 ‘오건조약(五件條約) 청체전말(請締顚末)’은 같은 날 논설 ‘시일야방성대곡’보다 중요한 기사였다. 을사늑약의 강압적 실상을 세상에 자세히 알렸기 때문이다.”(정진석 한국외대 명예교수)

대한제국기 언론인으로 활동했던 위암 장지연(1864~1921) 선생의 서거 100주년을 기념한 사단법인 장지연기념회(회장 조강환) 주최 ‘장지연 명(名) 논설과 사실보도 토론회’가 1일 서울 한국프레스센터에서 열렸다.

주제 발표를 맡은 정진석 교수는 을사늑약 당시 황성신문 사장이었던 위암의 논설과 기사를 재조명했다.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일본에 뺏긴 을사늑약에 대해 통분한 심정을 토로한 논설 ‘시일야방성대곡’(이 날에 목 놓아 크게 통곡하노라)은 ‘남의 노예 된 우리 이천만 동포여, 살 것인가 죽을 것인가’라며 애통해했다.

그런데 이 논설에 비해 잘 알려지지 않은 것이 그 뒤에 실린 위암의 보도 기사 ‘오건조약 청체전말’이었다. ‘5개 조약의 체결 전말’이란 뜻의 이 기사는 지면 한 페이지가 넘는 긴 분량으로 을사늑약이 일본의 강압과 무력 위협으로 체결됐다는 사실을 기록했다. ▲11월 15일 일본 대사 이토 히로부미가 고종에게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는 요구를 했고 ▲이를 고종이 불허하자 16일 일본 대사관에 대신들을 불러 협박했으며 ▲17일에는 일본군의 무력 위협 속에서 조약을 강제로 체결했고 ▲18일에는 조약 체결을 반대한 참정대신 한규설을 파면했다는 을사늑약의 경과가 이 기사에 상세히 실렸다.

이후 이 기사는 대한매일신보 호외에 영어로 전문 번역됐고, 영국 데일리메일의 종군기자 프레더릭 매켄지의 ‘대한제국의 비극’ 등에도 실려 일제의 대한제국 침략을 세계에 알리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 토론회에선 “치밀한 취재를 바탕으로 쓴 위암의 이 기사가 아니었다면 당시 을사늑약의 강압적 체결 사실이 세계에 제대로 전달되지 않을 수도 있었다”는 평가가 나왔다. 정 교수는 “위암은 우국(憂國)의 선비 정신을 언론 활동에 구현했으며, 신문을 통해 국민을 계몽하고 국가의 부강을 도모하고자 했던 인물”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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