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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80~ : 무적함대패배(1588) 네덜란드 독립(1581)

1590,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일본 통일

by 프리매쓰 2021. 9. 21.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일본 통일

 

1467년 오닌의 난 (센고쿠 시대의 시작)
쇼군 계승 논란이 겹쳐져 일어난 오닌의 난(1467년~1477년)은 일반적으로 센고쿠 시대의 서막으로 간주된다.
무로마치 막부 쇼군 아시카가 요시마사의 일관성 결여(애초에 동생 요시미를 후계자로 정했는데 뒤늦게 아들을 얻자 이를 번복)에서 비롯되었다.
이에 무로마치 막부의 간레이케(管領家)였던 호소카와 가쓰모토(細川勝元)(요시미를 지지함)와 야마나 모치토요(山名宗全)(요시마사의 아들을 지지함)의 대립이 표면화되면서 지방의 유력한 다이묘들도 속속 어느 한쪽에 가담하였는데, 이는 영토를 확장하고자 하는 다이묘들의 의도와도 맞물려 있었다.
호소카와 가쓰모토가 이끄는 동군과 야마나 모치토요이 이끄는 서군은 교토 근방에서 11년간 교전하였으며, 곧 다른 나라들의 전쟁으로 확산되었다.
난은 규슈 등 일부를 제외한 대부분의 지역으로 확대되었고, 막부와 다이묘들의 쇠퇴를 가속화시켰다.
이를 통해 무로마치 막부 체제는 센고쿠 시대로 전환되었고, 1세기 남짓 각지에서 다이묘들이 서로 항쟁하였다.
또한 주요 전장이 된 교토가 폐허가 된 것을 비롯해, 전국이 괴멸적인 피해를 입고 황폐해지게 된다.

 

1565년 에이로쿠의 변 (오다 노부나가 등장의 서막)
에이로쿠의 변(永禄の変)은 1565년 6월 17일, 미요시 3인방과 마쓰나가 히사히데가 군사를 이끌고 무로마치 막부 제 13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테루가 머무르고 있던 교토의 니조 어소(二条御所)를 습격하여 쇼군 요시테루를 암살한 사건이다.
미요시 3인방은 요시테루의 사촌형제인 아시카가 요시치카(足利義親, 후에 아시카가 요시히데(後に義栄)로 개명)을 아와지 국에서 15대 쇼군으로 옹립하고 미요시 정권을 수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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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68년 오다 정권 탄생 (오다 노부나가의 중앙무대 등장)
오와리 출신인 센고쿠 다이묘 오다 노부나가는 스루가 국의 유력 다이묘 이마가와 요시모토의 공격을 격퇴하고(오케하자마 전투), 미카와의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동맹을 맺었다(기요스 동맹).
북 오미를 다스리던 아자이 나가마사에게 여동생 오이치노카타를 정략결혼시켜 동맹을 맺은 후, 사이토 가문(斎藤氏)이 다스리는 미노 국을 제압하여 세력을 다지고 있었다.

죽은 13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테루의 친동생 아시카가 요시아키(足利義秋)는 죽은 형님의 가신들의 도움을 받아 암살의 위협에서 탈출하여, 에치젠 국의 다이묘 아사쿠라 요시카게에게 몸을 의탁하였다.
그러나, 아사쿠라 요시카케가 미요시 토벌을 주장하는 그를 무시하고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자, 1568년 음력 7월 미노의 노부나가에게 접근한다.
노부나가는 요시아키의 미요시 토벌 장계를 바로 받아들였고, 음력 9월, 노부나가는 쇼군을 옹립한다는 대의명분을 내세워 상경전을 개시하였다.
노부나가는 아자이 가문의 원군을 얻어 공통의 적인 오미 남부의 다이묘 롯카쿠 요시카타(六角義賢)를 공격하였고, 요시카타, 요시하루(義治) 부자는 오다 군의 맹공을 받고 간논지 성(観音寺城)이 함락되어 이가 국로 도주하였다(간논지 성 전투).
노부나가가 교토로 상경하자, 미요시 요시쓰구(三好義継)와 마쓰나가 히사히데는 노부나가의 실력을 눈치채고 항복하였고, 그 외의 미요시 3인방은 아와로 도주하였으며, 유일하게 저항하던 이케다 가쓰마사(池田勝正)도 노부나가에 항복하였다.
이렇게하여 교토와 기나이를 장악했던 미요시 정권은 겨우 6개월만에 무너졌고, 대신 아시카가 요시아키를 제15대 쇼군으로 옹립한 노부나가의 오다 정권이 탄생하였다.
이때, 노부나가는 요시아키로부터 부쇼군(副将軍)의 지위를 권유받지만 사절하였다고 한다.

 

1569년 혼코쿠지의 변 (미요시 3인방의 공격 격퇴)
1569년 음력 1월, 노부나가가 이끄는 오다 군 주력이 미노로 돌아간 틈을 타, 미요시 3인방과 사이토 다쓰오키 등의 미노 낭인무리가 공모하여 아시카가 요시아키가 있는 어소 로쿠조 혼코쿠지(六条本圀寺)를 공격한다(혼코쿠지의 변).
그러나, 노부나가는 폭설이 내리는 중에도 교토에 신속하게 돌아왔고, 노부나가가 도착 전에 아자이 나가마사, 이케다 가쓰마사의 원군과 아케치 미쓰히데의 분전으로 미요시, 사이토 군은 다시금 패퇴하였다.

 

1570년 가네가사키 퇴각 (유력 세력인 아사쿠라 공격 실패)
노부나가의 상락 요구를 거절하며 노부나가와 대립각을 세우던 에치젠 국의 아사쿠라 가문(朝倉氏)에 대하여, 1570년 4월에 노부나가는 에치젠으로 침공을 개시하였다.
아자이 가문은 나가마사의 조부대부터 아사쿠라 가문과 주종관계·인척관계 등으로 인연이 깊었기 때문에, 나가마사는 노부나가를 배반하여 에치젠을 공격하는 오다 군의 배후를 습격하였다.
오다 군은 아사쿠라 가문과의 전투에서 우위를 점하고 있었으나, 나가마사의 배반으로 졸지에 협공을 당하게 되었다.
전황이 단숨에 일변하여 노부나가는 위험한 상황에 빠졌으나, 가네가사키(金ヶ崎)에 남아 아사쿠라 군의 추격을 죽음으로 막은 휘하들의 결사적인 퇴각전으로 목숨을 구했다(가네가사키 퇴각, 金ヶ崎撤退戦).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이케다 가쓰마사(池田勝正), 아케치 미쓰히데와 함께 후위부대를 맡아 공을 세웠다.

 

1570년 아네가와 전투 (유력 세력인 아사쿠라, 아자이 견제)
노부나가가 가네가사키 전투의 보복을 위해 군비를 재정비하고 북 오미로 출진하였다.
아자이 가문의 본거지인 오다니 성(小谷城)까지 진군한 오다 군에 맞서 아사쿠라 요시카게는 일족인 아사쿠라 가게타케(朝倉景健)를 총대장으로 삼아 병력을 파견하였다.
6월 28일, 아네가와 강변에서 오다·도쿠가와 연합군 28,000명과 아자이·아사쿠라 연합군 18,000명이 비와 호로 흐르는 아네가와를 끼고 대치하였다.(아네가와 전투, 姉川の戦い)
아자이 군은 오다 군에 비해 병력에서는 열세였으나, 아자이 군의 선봉 이소노 가즈마사(磯野員昌)가 이끄는 아자이 가문의 정예부대가 오다 군 선봉 사카이 마사히사(坂井政尚) 부대를 돌파한 것을 시작으로, 파죽지세로 이케다 쓰네오키(池田恒興), 도요토미 히데요시, 시바타 가쓰이에의 진을 차례차례 격파하여 오다 군의 13단의 진 중 11단까지 쳐부수는 맹공을 보였다.
그러나, 오다 군의 후방에서 요코야마 성(横山城)의 견제를 맡고 있던 이나바 잇테쓰등의 구원으로 오다 군은 간신히 위기를 벗어났다.
이나바 잇테쓰의 구원군을 시작으로 요코하마 성 공격에 참가하던 우지이에 보쿠젠(氏家卜全), 안도 모리나리(安藤守就) 등이 오다 군의 증원으로 가세하여, 무방비 상태인 아자이 군의 측면을 공격하자 아자이 군도 우익부터 무너져 내리기 시작하였다.
아자이·아사쿠라 연합군은 홋코쿠 방향으로 패주하는 동안 오다 군의 추격을 받아 다수의 전사자를 내는 결과가 되었다.

 

1570년 시가의 진 (유력 세력들[미요시, 아사쿠라, 아자이, 이시야마 혼간지, 엔랴쿠지]의 노부가가 포위망 결성)
1570년 음력 8월 노부나가는 셋쓰(오사카)에서 거병한 미요시 3인방을 토벌하려 출진하지만, 이시야마 혼간지의 원군 때문에 고전한다.
게다가 노부나가 본대가 셋쓰에 머물고 있는 동안, 아자이, 아사쿠라, 엔랴쿠지 등의 연합군 3만이 오미 사카모토로 쳐들어 온다.
음력 9월 23일 노부나가가 급히 본대를 돌려 셋쓰에서 오미로 귀환하자, 아자이, 아사쿠라 연합군은 히에이 산(比叡山)으로 자리를 옮겨 대항하였다.
이렇게 되자 노부나가는 오미 국 시가에서 아자이, 아사쿠라 연합군과 대치하게 된다.(시가의 진(志賀の陣)).
그러나, 그 기간동안 혼간지의 수장 겐뇨(顕如)의 명을 받은 이세 나가시마의 일향종이 반기를 들어, 오다 령의 오와리, 이세를 공격하였고,
사방을 적에 둘러싸여 궁지에 빠진 노부나가는 조정에 화친을 중재해줄 것을 요청하여, 음력 12월 13일 아자이, 아사쿠라 연합군과 화친하였다.
이때, 오쿠보 다다타카(大久保忠教)가 저술한 《미카와 이야기(三河物語)》에 따르면 노부나가는 요시카게에게 “천하는 아사쿠라님이 가지시고, 저는 두 번 다시 천하를 바라지 않겠나이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1571년 엔랴쿠지 소각사건 (유력 세력인 엔랴쿠지 정벌)
1571년 음력 9월, 몇 번이고 퇴거와 중립 엄수를 권고했으나 이에 응하지 않고 노부나가의 적대세력을 비호해 주거나 저항을 계속한 히에이 산의 엔랴쿠지를 불태웠다.
이를 히에이 산(엔랴쿠지) 소각 사건이라고 하며, 법도 미치지 않는 성지인 히에이 산과 엔랴쿠지를 불태워 버리고,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사람을 학살한 이 사건은 당시의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다.

 

1572년 미카타가하라 전투 (유력 세력인 다케다 신겐의 참전)
수세에 몰리던 아시카가 요시아키의 출병요청에 호응해, 가이의 다케다 신겐이 노부나가에 대한 총공격을 개시했다.
다케다 군의 총병력은 3만에 이르렀고, 여러 갈래로 나뉘어 미노 동부를 비롯하여 도쿠가와 령의 도토미, 미카와로 쳐들어왔다.
미노 동부에서는 다케다 군의 무장 아키야마 노부토모(秋山信友)가 이와무라 성(岩村城)을 공격하였고, 미노 동부 대부분이 다케다 가문의 손에 떨어졌다.
또, 도쿠가와 령에 있어서도, 노부나가는 사쿠마 노부모리(佐久間信盛), 히라테 히로히데가 이끄는 3천의 원군을 급파했지만, 음력 12월 미카타가하라 전투(三方ヶ原の戦い)에서 오다, 도쿠가와 연합군은 전멸에 가까운 참패를 당했다.
게다가 신겐의 상경전에 호응하여, 쇼군 아시카가 요시아키가 미요시 요시쓰구, 마쓰나가 히사히데와 협력해 거병한다.
동서로 적에 둘러싸인 노부나가는 궁지에서 빠져나가기 위해 1573년 음력 4월 5일 오기마치 천황(正親町天皇)으로부터 칙령을 받아 요시아키와 화친하였고, 음력 4월 12일 다케다 신겐이 급사하여 다케다 군은 가이로 귀환하고 노부나가 포위망은 풀리게 된다.

 

1573년 무로마치 막부 멸망 (아시카가 요시아키 정벌)
신겐 사후, 노부나가는 전력을 가다듬어 음력 7월 반기를 든 아시카가 요시아키의 니조 성(二条城)과 마키시마 성(槇島城)을 포위 공격하여 요시아키를 교토로부터 추방하였다.
이로써 무로마치 막부는 역사에서 사라지고, 음력 7월 28일 연호를 겐키에서 덴쇼로 바꾸며 노부나가 정권이 수립되었음을 알렸다.

 

1573년 도네자카 전투 (유력 세력인 아사쿠라 멸문)
1573년 음력 8월 노부나가는 3만의 군을 이끌고 아사쿠라 요시카게의 에치젠 원정길에 올랐다.
도네자카 전투(刀根坂の戦い)에서 아사쿠라 군을 격파하고, 아사쿠라 요시카게가 있는 이치노다니 성으로 진격한다.
아사쿠라 요시카게는 도주를 시도하지만 가신들, 심지어는 아사쿠라 가게아키라(朝倉景健)같은 친족까지 배반해 이들에게 일제히 공격을 받아 자결하였고, 아사쿠라 가문은 멸문되었다.

 

1573년 아자이 가문 멸문 (유력 세력인 아자이 멸문)
음력 9월, 아자이 가문의 거성인 오다니 성(小谷城)을 공략하여 함락한다.
아자이 히사마사(浅井久政), 나가마사 부자는 자결하였고, 나가마사에 시집가 있던 노부나가의 동생 오이치노카타는 세딸 차차, 하츠, 고우와 함께 성이 함락되기 전 노부나가에게 인도되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아자이와의 전투에 공을 세워, 아자이의 영지였던 오미 3개군을 하사 받아 다이묘가 된다.

 

1574년 이세 나가시마 일향종 평정 (유력 세력인 이시야마 혼간지의 이세 세력 정벌)
1574년 음력 7월 노부나가는 3만의 대군을 이끌고 이세 나가시마를 수륙 양면으로 포위해 군량이 떨어지기를 기다리며 장기전을 시도한다.
나가시마 일향종 문도의 공격도 집요했기 때문에 이복형 오다 노부히로(織田信広)를 비롯한 다수의 무장이 전사하였고 노부나가 군도 심각한 타격을 입는다.
하지만, 음력 8월 병량이 고갈되었고, 오다 군의 맹공으로 오토리이 성(大鳥居城)이 함락되어 일향종 문도 천여명이 죽자, 음력 9월 29일 나가시마 성의 문도는 항복하였다.
이후 노부나가는 나가에 성(中江城), 야나가시마 성(屋長島城)에서 농성하고 있는 나가시마 문도에 대해서는 항복을 수용하지 않고 성을 포위공격하여 문도 2만여 명을 학살하였다.
이 전투로 노부나가는 혼간지의 수장 겐뇨(顕如)의 명을 받은 나가시마 일향종 신도의 반란을 잠재우는 데 성공하였다.

 

1575년 나가시노 전투 (유력 세력인 다케다 견제)
1575년 음력 4월 다케다 신겐의 아들 다케다 가쓰요리는, 신겐 사후 다케다 가를 배신해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가신이 된 오쿠다이라 사다마사(奥平貞昌)를 토벌하기 위해 1만 5천의 병력을 이끌고 사다마사의 거성 나가시노 성을 공격한다.
그러나, 오쿠다이라 군도 선전하였기 때문에 다케다 군은 나가시노 성을 함락하지 못하고 발이 묶인다.
음력 5월 12일 노부나가는 3만의 대군을 이끌고 기후를 출발해 음력 5월 17일 미카와의 노다에서 도쿠가와 군 8천과 합류하여, 나가시노 근교 시타라가하라(設楽原)에 진을 쳤다.
음력 5월 21일 오다, 도쿠가와 연합군과 다케다 군과의 전투가 벌어졌고, 다케다 군에 완승하였다(나가시노 전투).
《신장공기(信長公記)》에 따르면, 이 전투에서 노부나가는 1천여 정의 조총을 사용해 일제사격을 하였다고 전해지나 "총포대를 세 조로 나누어 시간차 없이 연속사격을 가했다"는 유명한 통설인 삼단사격(三段撃ち)이라는 전법을 실제로 사용했는지의 여부는 확실치 않다.
나가시노 전투에서 다케다 군은 야마가타 마사카게, 바바 노부하루등의 여러 핵심적인 장수들이 전사하는 등 회생 불가능한 타격을 입는다.

 

1575년 에치젠 평정 (유력 세력인 이시야마 혼간지의 에치젠 세력 정벌)
전년 오다 측의 치안관을 살해하고 에치젠을 장악한 혼간지 문도들 사이에서는 내분이 일어나 있었는데, 혼간지 신도들은 오다 측의 치안관이던 마에바 요시쓰구를 죽이는 데 협력한 현지 무사였던 도미타 나가시게마저 살해하는 등 폭주하고 있었다.
이는 1575년 겐뇨의 명으로 파견된 시모쓰마 라이쇼(下間頼照)가 오다 가문보다 더한 악정을 폈기 때문이었다.
이를 호기로 본 노부나가는 나가시노 전투가 끝난 직후, 음력 8월 에치젠으로 군사를 돌렸다.
혼간지 문도들도 저항하였지만, 혼간지 측의 악정에 불만을 품은 일부 문도들이 노부나가에 협력하였기 때문에, 시모쓰마 라이쇼, 아사쿠라 가게아키라를 비롯 1만 2천여명의 에치젠 국, 가가 국의 혼간지 문도가 토벌되었다.
이렇게 하여 에치젠은 다시금 오다 가문의 영지가 되었고, 노부나가는 에치젠 8개군을 시바타 가쓰이에에게 주었다.

 

1576년 덴노지 성채 전투 (유력 세력인 이시야마 혼간지 견제)
음력 4월 노부나가는 반 나오마사(塙直政)를 총대장으로 3만 대군을 이시야마 혼간지의 거점인 오사카로 파견하였지만, 아시하라 전투에서 대패하였고, 부장 반 나오마사를 비롯 1천여 명 이상이 전사하였다.
오다 군은 수세에 몰려 덴노지(天王寺) 성채에서 농성하였다.
노부나가는 음력 5월 5일 와카에 성(若江城)에서 동원령을 내려 모인 3천여 명을 이끌고 음력 5월 7일 이른 아침, 덴노지 성채를 포위하고 있는 이시야마 혼간지 문도 1만5천여 명에게 공격을 가하였다(덴노지 성채 전투).
노부나가 자신도 부상을 입는 등 격전이었지만, 성채에 있던 오다 군도 협공을 했기 때문에 승리할 수 있었다.
이 후, 오다 군은 이시야마 혼간지를 포위하여 병량이 고갈되기를 기다린다.
하지만, 음력 7월 13일 이시야마 혼간지의 원군인 모리 수군에게 오다 수군은 패배하였고, 이시야마 혼간지는 모리 가문으로부터 병량과 탄약을 보충받았다(제1차 기즈 강하구 전투).

 

1576년 2차 노부나가 포위망 (유력 세력들[우에스기 겐신, 이시야마 혼간지, 모리]의 2차 노부나가 포위망 결성)
에치고 국의 센고쿠 다이묘 우에스기 겐신(上杉謙信)과의 관계가 악화되었고, 1576년 겐신은 이시야마 혼간지와 화친하며 노부나가와의 동맹관계를 파기하였다.
겐신을 맹주로 모리 데루모토, 이시야마 혼간지, 하타노 히데하루, 기슈의 사이카 무리등이 동조하여 제2차 노부나가 포위망이 결성되었다.
1577년 음력 2월 기슈 사이카 무리를 토벌하기 위해 대군을 이끌고 출진하지만, 모리 수군의 원조와 겐신의 노토 침공으로 인해 음력 3월 형식적으로 사이카 무리의 수령 사이카 마고이치(鈴木孫一)와 화친하고 기이에서 퇴각하였다.
한편, 겐신의 공격을 견디고 있던 노토의 나나오 성의 친 노부나가 파는 노부나가에게 원군을 요청하였다.
노부나가는 시바타 가쓰이에를 총대장으로 3만 대군을 선봉부대로, 자신이 이끄는 본대 1만 8천을 후위부대로 출진하였다.
그러나, 음력 9월 15일 나나오 성은 함락되어 친 오다파였던 성주는 살해당하고, 음력 9월 23일 선봉부대인 시바타 군은 데토리 강 전투에서 참패한다(테토리 강 전투, 手取川の戦い).
노부나가가 궁지에 몰린 것으로 본 야마토 국의 마쓰나가 히사히데(松永久秀)는 다시금 노부나가를 배신, 겐신에 호응하여 거병하였다.
히사히데의 모반을 알아차린 노부나가는 가가 국에서 철군하여 오다 노부타다를 총대장으로 한 토벌군을 시기 산성(信貴山城)으로 급파해 포위하였고, 음력 10월 마쓰나가 군은 완전히 진압되었다(시기 산성 전투, 信貴山城の戦い).

 

1578년 우에스기 겐신 사망 (유력 세력인 우에스기 정벌)
음력 3월 13일 우에스기 겐신이 급사하였고, 평생 여자를 가까이하지 않는 계율을 지켜 양자만 둘(우에스기 가게카쓰, 우에스기 가게토라) 있던 겐신은 후계자를 확실히 정하지 못한 채 죽었기 때문에 가문내에서 내분이 일어났다(오타테의 난).
이 틈을 노려 오다 군은 우에스기 령의 노토, 가가를 공략하였다. 겐신의 죽음에 따라 2차 노부나가 포위망은 붕괴되었다.

 

 

우에스기 겐신 사망 이후 노부나가는 다방면으로 세력을 뻗치기 시작한다. 수하 장수에게 다이묘급의 영지를 주어 전 방면을 공략하였다.
호쿠리쿠 방면 - 시바타 가쓰이에 군단
나카센 방면 - 오다 노부타다 군단 (타키가와 카즈마스 군단)
기나이 방면 - 아케치 미쓰히데 군단
주고쿠 방면 - 하시바 히데요시 군단
시코쿠 방면 - 니와 나가히데, 오다 노부타카 군단 (1582년 결성)
혼간지 방면 - 사쿠마 노부모리 군단
도카이도 방어 - 도쿠가와 이에야스 (단, 도쿠가와 가문과는 동맹관계)

 

 

1580년 이시야마 전투 종료 (유력 세력인 이시야마 혼간지 정벌)
1578년 음력 11월 6일 제2차 기즈 강하구 전투에서 모리 수군이 대패하였고, 이시야마 혼간지와 아라키 무라시게는 보급이 끊겨 고립된다.
1579년 동년 음력 9월에 아라키 무라시게는 처와 자식을 남겨둔 채 아리오카 성(有岡城)을 버리고 도주하였다.
동년 음력 10월 비젠 국의 우키타 나오이에(宇喜多直家)가 모리 가문을 배반해 오다 가문에 복속하자 전황이 역전되었다.
또, 혼간지 불교세력과는 동년 음력 4월 오기마치 천황의 칙령이 내려 유리한 조건으로 화친하였다.
이 화친조약의 조건에 따라 혼간지 세력은 오사카로부터 퇴거하였고, 10년에 걸친 이시야마 혼간지와의 전투는 종결되었다.

 

1581년 아와지국 공략 (유력 세력인 모리 견제)
1581년 이나바(因幡) 야마나 가문의 가신단이 야마나 도요쿠니(山名豊国)를 추방하고 모리 가문의 깃카와 쓰네이에(吉川経家)를 맞이하여 돗토리 성(鳥取城)에서 반기를 들었다.
히데요시는 돗토리 주변의 병량을 매석해 돗토리 성을 병량고에 시달리게 하여 성을 함락한다(돗토리 성 전투(鳥取城の戦い)).
그 후에도 주고쿠 지방 일대를 세력하에 둔 모리 데루모토(毛利輝元)와의 전투를 계속하였다.
같은 해 이와야 성(岩屋城)을 공략해 아와지 국(淡路国)을 세력하에 두었다.

 

1582년 다케다 정벌 (유력 세력인 다케다 멸문)
음력 2월 3일 노부타다에게 동원령을 명하여 전격적으로 다케다 령을 공략하였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스루가에서, 호조 우지마사(北条氏直)는 간토에서, 가나모리 나가치카(金森長近)가 히다에서, 노부타다는 기소에서 다케다 령으로 진격하였다.
그 수는 10만여 명을 넘었다고 한다.
이에 대해 다케다 군은 제대로 대응조차 하지 못했고, 더욱이 다케다 일족인 스루가 에지리 성(江尻城) 성주 아나야마 노부키미(穴山信君) 등의 주요 무장이 노부나가에 항복하였다.
노부타다의 진격이 빨라, 체제를 정비하는 것이 불가능해 스와(諏訪)에서 철퇴한 다케다 가쓰요리는, 신푸성(新府城)을 불태우고 도망쳤다.
노부타다는 추격전을 개시하여, 노부나가의 본대가 다케다령에 들어오기 전에, 다케다 가쓰요리 · 다케다 노부카쓰(武田信勝) 부자를 덴모쿠 산 전투(天目山の戦い)에서 자결에 이르게 해, 다케다가문을 멸망시켰다.
다케다 가문 멸망 후, 노부나가는 다케다 잔당 토벌을 명하였고, 남아 있던 다케다 가의 일족은 철저하게 소탕되었다.

 

1582년 주고쿠 정벌 (유력 세력인 모리 정벌)
주고쿠를 정벌 중이던 히데요시는 1582년 빗추(備中国) 공략에서 시미즈 무네하루(淸水宗治)가 지키는 다카마쓰 성(高松城)을 수공으로 공략할 때, 모리 데루모토, 깃카와 모토하루(吉川元春), 고바야카와 다카카게(小早川隆景) 등의 모리 가문의 대군과 대치하게 되어 오다 노부나가에게 원군을 요청하였다.

이후, 주고쿠 정벌중 노부나가의 자결 소식을 들은 히데요시는 노부나가의 죽음을 비밀로 하고 신속하게 주고쿠를 정벌한 후, 귀환한다.

 

1582년 혼노지의 변 (부하의 배신으로 오다 노부나가 자결)
음력 5월 주고쿠의 모리와 대진하고 있었으나 고전을 면치 못하던 히데요시의 사자로부터 원군을 요청받는다.
노부나가는 즉각 미쓰히데에게 히데요시의 원군을 명하고, 음력 5월 29일 모리 원정 출정에 대한 준비를 위해 거성인 아즈치를 떠나 교토로 상경하여, 혼노지에서 숙식하였다.
하지만, 원군으로 보내질 아케치 미쓰히데의 부대는 방향을 바꾸어 돌연 교토로 진입하였고, 음력 6월 2일 혼노지를 급습하였다.
기밀 유지를 위해 혼노지를 급습하기 전까지 목표가 노부나가가 있는 혼노지라는 것을 알리지 않았고 "교토에서의 열병식에 참가하기 위해서 교토로 간다"라고 말했다 한다.
혼노지를 급습하기 직전에서야 미쓰히데는 노부나가에 대한 쿠데타가 목표인 것을 수하 군사에게 알리는데, 이때 미쓰히데가 했다고 전해지는 말이 그 유명한 "적은 혼노지에 있다(敵は本能寺にあり)"이다.
1백 명 정도의 호위군 밖에 없었던 노부나가는 미쓰히데의 반란 소식이 알려지자 "어쩔 방도가 없다(是非に及ばず)"라는 말을 남기고 스스로 창을 가지고 항전했으나, 압도적 병력차 때문에 수세에 몰렸고 노부나가는 처소로 돌아가 혼노지에 불을 지르고 그 속에서 자결하였다. 향년 49세.
또한, 적자 오다 노부타다도 교토의 니죠 신고쇼에서 아케치군의 공격을 받고 자결하였다.

부하의 배신으로 인해, 오다 노부나가는 전국통일을 눈앞에 두고 자결하게 된다.
1582년 시점에 모리 세력까지 정벌하여, 교토주변을 모두 노부나가의 세력하에 두었고, 바다건너 시코쿠지역, 남쪽의 큐슈지역과 동쪽의 칸토, 토호쿠 지역만 남은 상태였다.
일본의 중심부를 통일한 노부나가의 세력은 각 지방의 세력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였으므로, 일본 전국통일은 시간문제였다고 할 수 있다.
오다 노부나가 사후, 노부나가 세력내부의 세력 다툼이 정리된 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전국통일을 진행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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